아세안이슈 2020-12-17
아세안 영화에 대한 몇 가지 단평
김영우
김영우 DMZ국제다큐멘터리영화제 프로그래머는 2014년부터 2019년까지 부산국제영화제 아시아 영화 담당 프로그래머를 역임했으며, 2019년 한-아세안 특별정상회의 부대 행사 중 하나인 ‘2019 아세안 영화주간’ 행사를 기획하기도 했다.
최근 몇 년간 아세안에 대한 관심이 증가하면서 아세안 국가를 주제로 하는 학술행사나 연구, 다양한 분야의 인적교류, 그리고 문화예술행사가 봇물 터지듯 이어지고 있다. 상품교역 중심에서 기술, 문화예술, 인적교류로 영역을 확장하려는 소위 ‘신남방정책’의 일환으로 아세안 국가들의 문화와 역사를 이해하기 위한 노력이겠으나, 활발한 상호교역이나 경제교류만큼 적극적인 인적교류와 문화예술교류에 이르기에는 시간과 장기적이고 정책적인 비전이 요구되는 시작단계라고 봐야 할 것이다. 문화예술 분야에서의 인적교류와 문화상품교류가 지속가능성을 가지기 위해서는 좀 더 세심하고 배려 있는 자세들이 요구되는데, 특히 동남아시아를 중심으로 한국 콘텐츠가 많은 주목을 받는 상황에서는 아세안 국가들을 소비시장이나 시장으로 바라보는 시각에서 벗어나, 문화교류의 대등한 파트너이자 문화예술산업의 동반성장을 도모하는 협력자로 상정해 협업을 도모해야 할 시기라고 할 수 있겠다. 협력은 상호이해를 전제로 할 때 성과를 낼 수 있는 법. 역동적으로 성장하고 있는 아세안 영화산업을 이해하고 비슷하지만 확연히 다른 아세안 국가들의 영화가 지닌 차이와 매력을 알아가는 첫걸음이 중요하다. 이 글은 아세안 영화와 영화산업의 경향을 간략하게 소개할 목적을 가졌지만, 개괄적인 총론이 아닌 몇 가지 키워드를 통해 아세안 영화의 일면을 들여다볼 것이다.
동남아시아 영화는 어디에서 볼 수 있나요?
2017년 아시아에서 대흥행을 기록한 태국 영화 <배드 지니어스>라는 영화가 있다. 입시시험과 ‘컨닝’이라는 자극적이면서도 익숙한 소재로 아시아 전역에서 흥행을 기록하며 태국 영화의 저력을 잘 보여준 영화지만, 아시아권에서 유일하게 한국에서만 다소 아쉬운 흥행성적을 기록하며 한국 관객의 높은 눈높이를 확인할 수 있었다. 미국 영화와 한국 영화가 양분하고 있는 한국의 극장은 유럽예술영화와 충성도 높은 관객을 지닌 일본 영화(애니메이션과 청춘물)들로 간신히 극장의 다양성을 유지하고 있다. 과거에 비해 이런 편중은 더욱 강화되고 있는데, 갈수록 다양성을 잃어가는 극장의 상황을 초래한 원인이 관객의 변화인지, 극장의 어쩔 수 없는 선택인지 라는 논쟁은 이 글의 관심사가 아니다. 다만 한국 극장에서 만날 수 있는 영화들의 국적이 갈수록 선택적이라는 점은 확실한데, 이는 여러 산업지표로도 확인할 수 있다. 영화진흥위원회가 발간한 2020년도판 <한국 영화연감>에 따르면, 2019년 국내업체와 외국 직배사 또는 배급대행사가 수입한 외국영화는 총 1,598편(영상물등급위원회 등급분류기준)인데, 2010년 381편에서, 처음으로 천 편이 넘었던 2014년(1,031편)과 비교해보면 지난 10년 사이 해외영화 수입이 5배 이상 증가한 것으로 기록된다. 이를 국가별로 보면, 2019년 기준으로 일본이 790편으로 편수로는 가장 많고, 373편인 미국은 편수로는 2등이지만 수입금액으로는 일본보다 4배 이상을 기록하고 있다. 아시아 국가로는 일본이 1위, 중국이 5위, 그리고 홍콩이 11위를 기록했는데, 홍콩에서는 2019년에만 15편의 영화가 수입되었다. 2019년에 수입된 해외영화 1,598편 중에서 주요 국가를 제외한 기타 국가로 분류된 지역의 영화들은 모두 116편으로 아세안 영화들이 모두 여기에 포함되어 있다.
반대로 한국 영화 수출실적을 보면, 2010년 276편에서 2019년에는 574편으로 두 배 이상 증가했다.
수출권역별로는 아시아가 전체 70% 정도를 차지하고 있으며, 2019년 주요 수출국을 보면 대만과 일본이 각각 1위와 2위를 차지했고, 10위권 국가를 보면, 4위에 싱가포르, 9위에 인도네시아, 10위에는 베트남이 올라 있다. 2018년에는 필리핀이 10위권이었는데, 2019년 인도네시아와 그 자리를 바꾼 것으로 보인다.
순위 | 국가 |
---|---|
1위 | 대만 |
2위 | 일본 |
..... | |
4위 | 싱가포르 |
9위 | 인도네시아 |
10위 | 베트남 |
[표] 2019년 한국영화의 주요 수출국
특히 아세안 국가로만 한정해서 보면, 수입하는 영화 편수와 수출하는 영화 편수가 상당히 불균형적이라는 점을 할 수 있다. 물론 수입된 영화들이 모두 극장 개봉을 목표로 하는 것도 아니고, 관객의 선택과 취향을 강제할 수 없는 시장의 기본원리를 무시할 수 없다는 점, 그리고 기계적인 숫자의 균형이 중요한 건 아니지만, 최근 온라인을 기반으로 다양한 플랫폼을 통해 영상 콘텐츠에 접근이 쉽다는 점을 고려할 때 전통적인 방식을 넘어선 새로운 접근방식을 시도할 수 있으리라는 기대가 있다.
극장에서 만나기 힘든 아세안 영화들은 국내에서 열리는 주요 국제영화제에서 주로 만날 수 있다. 부산국제영화제는 아시아 영화와 한국 영화의 소개와 발굴을 영화제의 주요 정체성으로 삼아 성장해왔으며, 전주국제영화제나 부천국제영화제도 각 영화제의 정체성이나 방향성에 맞춘 프로그램을 통해 아시아를 비롯한 아세안 영화를 소개하고 산업프로그램과 지속적인 네트워크를 통해 주요한 역할을 해오고 있다. 하지만 영화제를 통해 소개되는 영화들은 자국 내에서 개봉도 못 하거나 큰 흥행으로 이어지지 못하는 경우가 다반사다. 이는 한국 영화계도 비슷한데, 예술영화나 독립영화로 분류될 경우, 종종 자국 관객들의 외면을 받는 것과 유사하다. 하여, 대부분 아세안 국가는 자국 관객을 대상으로 하는 상업영화와 영화제나 예술영화시장을 목표로 하는 영화들로 나뉘는 것을 흔히 볼 수 있다. 물론 이 경계가 항상 고정된 것은 아니다. 최근 필리핀에서 가장 핫한 감독으로 알려진 앙트와넷 자다온(Antoinette Jadaone) 감독은 상업영화와 독립영화의 경계에서 작업하며 큰 성공을 거두고 있다. 메인스트림과 인디펜던트를 조합한 ‘Maindie’라고 불리는 이러한 영화들은 지난 2000년대 웰메이드 상업영화로 분류되었던 한국 영화들을 상기시킨다. 인도네시아도 마찬가지다. 언론기사나 여러 지면을 통해 많이 언급되었지만, 거대한 인구를 바탕으로 지난 5년 동안 30%가 넘는 폭발적인 영화산업의 성장세를 보여주고 있는 잠재력을 지닌 국가다. 상업영화와 함께 동반성장하고 있는 예술영화에 주목할 만한데, 10년 전과 비교하면, 연간 10편 정도 제작하던 영화 편수가 최근 150편 정도까지 증가했고 자국 영화를 관람하는 관객의 수도 5천만 명에 달할 정도로 폭발적으로 성장하고 있다. 이러한 지표들에 기반해 많은 전문가가 아시아 문화를 주도할 넥스트 국가로 인도네시아를 주목하고 있기도 하다. 인도네시아를 대표하는 수많은 감독과 뛰어난 여성 프로듀서에 대해선 다른 기회를 빌려 다시 논하기로 하고, 여기서 주목하고 싶은 감독은 조코 안와르(Joko Anwar)다. 2015년 한국과 인도네시아 최초 합작영화로 기록된 <내 마음의 복제(A Copy of My Mind)>를 연출한 조코 안와르는 이 영화로 베니스영화제 오리종티에 초청되었다. CJ E&M이 인도네시아와 베트남 등 잠재력을 지닌 아세안 국가로 적극적인 진출을 시도하던 초창기에 나온 성공사례인 셈인데, 이후 CJ E&M은 다시 조코 안와르와 함께 <사탄의 숭배자(Satan’s Slaves)>를 제작해 2017년 최고 흥행을 기록한다. 상업적인 성공을 기반으로 조코 안와르 감독은 새로운 시도를 하고 있는데, 그 시작이 바로 2019년 등장한 <군달라: 슈퍼 히어로의 탄생(Gundala)>이라는 슈퍼 히어로 시리즈다. 마블 유니버스처럼 만화를 원작으로 해 수많은 캐릭터가 등장해 만들어갈 부미랑잇 유니버스(BumiLangit Universe)는 산업적 열망과 야심을 지닌 인도네시아 영화산업의 현재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장면이다. 유사한 예는 베트남의 <퓨리(Furie)>에서도 찾아볼 수 있는데, 응오 딴 반(Ngo Thanh Van)이 주연과 제작을 맡은 강렬한 액션 영화로, 할리우드 제작진과 결합해 완성도 높은 액션장면과 볼거리를 주는 영화이자 역대 흥행작 5위를 기록한 영화다. 최근 롯데가 참여해 제작한 <완벽한 타인>의 베트남 리메이크 버전이 역대급 흥행을 기록하고 있는데, CJ E&M과 롯데가 베트남 영화산업의 주요 파트너이자 협력자로 산업적 성장에 기여한 점은 평가받을 기회가 있을 것이다.
개방성과 다양성은 나의 힘
아세안 국가는 하나의 단일한 공동체가 아니다. 마찬가지로 아세안 영화를 몇 가지 키워드로 분류하고 특징짓는 것은 폭력적일 수도 있다. 하지만 몇 개의 키워드를 통해 아세안 영화를 이해하는 실마리를 찾는 시도는 해볼 수 있을 것이다. 예를 들어, 호러영화나 공포영화가 유난히 강세를 보이는 아세안 영화들의 특징을 불교문화권이라는 종교적 관련성을 통해 이해하거나, 보수적인 사회에서 종교적, 정치적 통제를 우회하는 하나의 방법으로 호러나 공포 장르를 택할 수도 있을 거라는 분석도 가능할 것이다. 필리핀의 경우, 아시아에서 두번째로 가장 많은 섬으로 이루어진 다인종 다문화 국가라는 지리적인 특징이 언어와 문화의 다양성으로 발현되었는데, 그 지점이 필리핀 영화에 어떻게 반영되는지를 확인하는 것도 흥미로운 지점일 것이다. 또한, 2000년대 초반 혜성과 같이 등장했던 말레이시아 뉴웨이브를 주도했던 젊은 감독들을 비롯해 태국과 싱가포르 등 아세안 예술영화를 주도하던 감독들의 배경이 화교라는 점도 주목할 만한 지점이다.
아세안을 이해하는 의미 있는 키워드는 개방성과 다양성이다. 동남아 ‘국가 연합’이지만, 종교, 역사, 인종적 차이가 상당히 큰 편인데, 그런 차이들이 충돌하며 빚어내는 상호개방성과 다양성이 아세안 국가를 설명하는 데 유의미하다는 뜻이다. 다양성이라는 키워드는 아세안 영화를 설명하는 데 아주 중요하다. 이슬람과 불교, 힌두교 등 외래종교와 토속신앙이 혼재하는 세계관은 아세안 영화들을 구성하는 지배적인 세계관으로 작동하고 있다. 또한, 유럽의 식민지를 오랫동안 경험한 탓에 외부문화에 대한 개방성과 자민족 문화에 대한 자부심이 공존하는 경향을 띠곤 하는데, 이런 지점 역시 영화에도 반영되고 있다. 예를 들어 1990년대 중반 폭발적인 영화산업의 성장을 보여줬던 태국의 경우, 논지 니미부트르(Nonzee Nimibutr) 감독의 <낭낙(Nang Nak)>과 태국 최초 천만관객 영화인 반쫑 삐산타나꾼(Banjong Pisanthanakun) 감독의 <피막(Pee Mak)>은 오랫동안 구전되어온 귀신 이야기를 현대적으로 재해석한 영화였으며, 한국을 비롯해 아시아 전역에서 크게 흥행했던 <옹박(Ong-Bak)> 시리즈도 개방성과 민족문화에 대한 자긍심의 공존을 잘 보여주는 예시가 된다.
동남아시아에서 종교가 차지하는 위상과 영향력은 우리와는 사뭇 다르다. 사회에 대한 종교의 영향이 상당히 지대하며 개인의 의식과 생활에도 미치는 영향이 크다. 동남아시아는 크게 상좌불교권과 이슬람권으로 나누어진다. 상좌불교는 동북아시아의 대승불교와 달리 탁발과 청식에 의존하는 태국, 라오스, 미얀마, 캄보디아 등의 불교를 말하는데, 이 지역에서 제작되는 영화에는 승려들이 자주 등장하곤 한다. 분송 낙푸(Boonsong Nakphoo) 감독의 <방랑(Wandering)>은 승려 출신 감독이 도망간 아내와 아이를 잃은 후 스님이 되는 과정을 그린 영화였고, 2017년 부산국제영화제를 통해 소개되었고 주목을 받았던 <마릴라: 이별의 꽃(Malila: The Farewell Flower)>의 경우도 죽음으로 떠나보낸 연인을 두고 죽음을 화두로 수행하는 스님의 이야기를 다룬 영화다. 2014년 최고의 영화로 주목받았던 체코- 미얀마 합작영화이자 테 마우 나잉(The Maw Naing) 감독의 <수도승(The Monk)>은 동자승으로 시작해 청소년이 되면서 이성에 호감을 느끼기 시작하는 수도승의 일상과 흔들리는 감정을 담아낸 수작으로, 남방 아시아의 문화와 분위기가 잘 담긴 영화다.
따로 또 같이
위에서 언급한 아세안 영화의 특징과 아세안 지역 내 활발한 협업을 잘 보여주는 하나의 사례를 소개하며 글을 마치려 한다. HBO ASIA는 지난 2018년 아시아 6개국 감독을 초청해 6개의 에피소드로 구성된 <포크로어(Folklore)> 시리즈를 선보인 바 있다. 싱가포르를 대표하는 감독인 에릭 쿠(Eric Khoo)가 총연출을 맡고 한국(이상우)과 일본(다쿠미 사이토, Takumi Saito)을 비롯해, 인도네시아(조코 안와르), 싱가포르(에릭 쿠), 태국(펜엑 라타나루앙, Pen-Ek Ratanaruang), 말레이시아(호유항, Ho Yuhang) 등이 참여해 괴담을 공통주제로 삼아 완성한 드라마 시리즈는 해외 영화제에서도 호평을 받으며 HBO를 통해 대중들에게 공개되었다. 그리고 두 번째 시리즈 제작계획이 얼마 전 공개되었다. 이번에도 에릭 쿠가 총연출을 맡았고, 총 7명의 감독이 7개국을 대표해 연출을 맡을 예정이다. 2021년 공개를 목표로 하는 이번 시리즈에 참여하는 7명의 감독들은, 시티시리 몽콜시리(Sittisiri Monkolsiri, 태국), 료 시한(Liao Shih-Han, 대만), 에릭 마티(Erik Matti, 필리핀), 빌리 크리스티안(Billy Christian, 인도네시아), 니콜 미도리 우드포드(Nicole Midori Woodford, 싱가포르), 브래들리 리우(Bradley Liew, 말레이시아), 마츠다 세이코(Matsuda Seiko, 일본) 등이다. 두 번째 시리즈는 ‘공포의 강도를 더욱 높이고 초자연적인 힘 앞에 선 인간의 모습들을 탐구’할 예정이라고 한다. ‘괴담’이라는 가장 아세안다운 소재와 아세안만이 할 수 있는 협업방식의 프로젝트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